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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학교 합격했는데, 글쎄 오빠가 돈아까우니 보내지 말라고 편지까지 썼더라

늘그랬듯이 2023. 6. 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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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922년에 태어났어.

내가 태어났을 때는 1922년이어서 가부장제가 너무 심해서 남자형제들만 돌림자를 썼던 때야.

아들만 셋인 딸이 귀한 집안이어서 운좋게 큰 환영을 받으며 돌림자를 쓰게 되면서 태어났지

 

 

유복한 집안이었는데 부모님이 종교영향으로 서구화가 되서 제사도 지내지 않았어.

어머니가 내가 18살 때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클레멘타인을 부를 정도였어...

 

 

 

 

 

 

 

 

 

 

어머니는 공부를 중시하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다짐을 했지

 

1. 비혼

2. 건강관리

3. 공부로 만회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니까 이런 판단을 한거야.

 

 

 

 

 

 

 

 

 

 

내가 이화전문학교에 합격했는데.. .

 

글쎄 큰오빠가 아빠한테

계집애한테 학교갈 돈이 아깝다며 보내지 말라고 쓴 편지를

내가 보게 되었어.

 

아버지도 나보고 학교에 가지 말래는거야..

 

 

그래서 이대로면 평생 이 집에 묶일까 싶어

 

그 길로 바로 서울로가서 물어물어 친척오빠의 아이를 가르치는 돈으로 대학에 들어갔어.

 

 

 

 

 

 

 

 

 

그렇게 평균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은 채로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어.

 

서울대가 갓 여남공학이 되었을 때 들어가서 여학생들이 너무 적고, 너무 쑥스러워해서 고개를 못들더라.

어디 가도 안방이나 부엌같은데 가있고 남자애들만 호연지기를 뽐내더라.

그래서 내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

 

나는 여성이 언제나 뒷자리를 차지 하는 2등시민인게 너무 불편했어.

 

난 민족주의 운동, 여성인권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학생 조직의 리더로 활동했어.

 

사범대 별명이 다스 (독일어로 중성) 였어

 

 

 

 

 

 

 

 

 

 

"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왜냐면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조국을 위해 전사했다며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민 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만 있다.

 

몽골군에 끌려 갔다 온 여자는 화냥년으로

일제강점기에 끌려갔다 온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낙인 찍히고 멸시당했다.

 

그 원인은 가부장제였다."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우리말속에는 남성을 중시하고 여성을 멸시하는 말이 수없이 많다.

나는 그녀라는 말이 알레르기 일으킬 정도로 싫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는?

 

 

부산 피난을 갔는데

그때도 친구랑 같이 대한여자청년회를 만들었어.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선생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에도 참여했고

 

여기서 남녀차별 철폐운동을 했는데 이게 1980년 가족법 철폐에 큰 역할을 했어.

가족법 전 개정까지는 여성이 남편, 아들에게 종속되서 여성은 법적권리를 보장받지 못했어.

 

 

그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958년 귀국했지.

 

 

 

갔다오니까,

 

내 모교 이대 교수를 하던지

YWCA(여성계 선도하는 엘리트 집단)에서 사회운동가를 할지 선택해야 했어.

 

내가 뭘했게?

 

 

 

 

 

 

 

사회운동가.

 

 

첫번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어

 

첩이 이 당시에는 일상화되어 있었어.

그래서 첩이 몰래 혼인신고를 하면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던 조강지처가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지

첩이 있는 사람들은 국회에 보내지 말자. 첩 있는 사람이 나라를 망친다. 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했어

 

 

 

 

 

 

 

 

 

 

그 후엔 말이 잘통하고 인생의 업을 이룰 파트너인 2살 연하와 결혼을 했어

주변에서 아주 반대도 많았지.... 더 활동못하는 거 아니냐고.. 대학 졸업전까진 하지 않았으니 일단...

결혼 후에는 남편이 야당 정치인이라 각종 여러 핍박을 만들어서 여성운동활동을 이어가긴 힘들었어.

 

 

이 때 부부는 동등하다고 생각해 문패도 두개를 걸어놨는데

이 당시에는 있을 수 없던 일이어서 주변에서 난리도 아니었어

 

 

 

 

 

 

 

 

 

그리고는 어린이 문제에 많은 노력을 했고 여성부(현 여성가족부)가 생길 수 있게 노력했어.

별별 다양한 고난을 많이 겪었어...

 

후에

남편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내가 이 상을 함께 받아야한다 했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남성과 여성이 차별 받지 않고 동등한 사회에 살고 싶은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나 너무 일찍 꾼 꿈이였으리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이희호 (1922-2019)

 

 

 

 

*내용 참고. 듣똑라 ep.108 시대의 선구자, 이희호(19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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